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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장군 사당
안용복장군사당
 
수영출신으로 조선조 숙종 때 사람이다.
좌수영 수군의 능로군(노 젓는 병사)에 속해 있던 군졸로서 두 차례에 걸쳐 울릉도와 독도를 침략한 왜인들을 몰아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 받아온 사람이다.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으로 봉해졌으며, 그의 충절을 기리기는 사당이 수영공원내에 있다.


안용복장군사당
 
 
슬프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매양 숨겨진 속에 큰 인물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니, 저 동래 사람 안용복 님이 바로 그 한 분이시다. 그는 본시 수영 군졸로 조선 숙종 19년 계유 1693년 여름 울릉도에 표착하여 국경을 넘어온 왜들과 싸운 끝에 강제로 끌려가 오랑도로 호우주이끼로 다니면서 끝까지 항쟁하여 일본이 울릉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에도(江戶) 관백의 서약서를 받아 쥐었으나 대마도에 이르러 도로 빼앗기고 50일 동안 구류까지 당한 뒤에 동래 왜관으로 와서 또 40일을 갇혔다가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던 바, 부사 또한 월경하였다 하여 도리어 형벌을 가했다. 2년이 지난 후 그는 흥해 사람 동지 열 사람을 데리고 다시 울릉도로 가서 왜적을 만나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돌아왔다. 장군은 그 이유로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할 뻔했는데, 대신들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 여기 그의 행적을 적고 다시 헤아리매 저 섬이 우리 판도 속에 들어 있음은 오직 그의 은공이다.

남쪽의 선비들이 찬양회를 결성하고 겨레의 이름으로 울릉군에 봉한다 함은 진실로 느꺼운 일이다. 그를 위하여 한 덩이 돌을 세움에 미쳐 내 이제 노래를 붙이오니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님 혼자 애쓰던가 / 상이야 못 드릴망정 형벌 귀양 어인 말고 / 이름이 숨겨지다 공로조차 묻히리까 / 이제 와 울릉군 봉하오니 웃고 받으옵소서.

1960년 10월 3일 개천절 이은상 지음


선상탄(船上嘆) 중에서

강개(慷慨) 넘친 장한 기개(氣槪)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 자그마한 이 몸이 병(病)조차 들었으니 분함 품고 원통함을 폄이 어려울동 하건마는 그러나 죽은 제갈량(諸葛亮)도 산 중달을 멀리 쫓고 발 없는 손빈(孫矉)도 방연(龐涓)을 잡았거든 하물며 이 몸은 손발이 갖춰 있고 목숨이 이었으니 쥐 개 같은 도적을 조금이나 두려워할 소냐. 적선(敵船)에 달려들어 선봉(先鋒)을 무찌르면 구시월(九十月) 서릿바람에 낙엽(落葉)같이 해 치우리라. 제갈량이 적을 일곱 번 놓아주었다가 일곱 번을 사로잡은 일 우린들 못할 것인가. 벌레같이 꾸물대는 섬나라 오랑캐들아 빨리 빌고 항복(降服)하려무나. 항복한 자 죽이지 않으니 너희들 구태여 섬멸(殲滅)하랴. 우리 임금 거룩한 덕(德) 함께 살기를 바라시니라. 태평한 세상에 요순(堯舜)시절 군민(君民)되어 해달 같은 성왕(聖王)의 덕(德)은 나날이 새롭게 밝거든, 전선(戰船)타던 우리들도 어주(魚舟)에서 늦도록 노래 부르고 가을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다시 보려 하노라.

노계 박인로(1561 ~ 1642)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선유소 유허비(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 船遊所 遺墟碑)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29-1번지